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음력 3월 19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서 아버지 혼준과 어머니 이씨부인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영후, 호는 난파, 본관은 남양이다.
난파는 7세때 서울로 이사하여 이화학당근처에서 살면서 정동감리교회에 나가면서부터 서양음악인 찬송가를 듣고 배웠으며 중앙기독교 청년회(YWCA)중학부 1학년대 이미 간단한 찬송가는 독보법을 스스로 해독하는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 중앙기독교청년회 중학부를 졸업한 난파는 이듬해인 1913년 9월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음악교육기관이던 조선정악전습소의 양악부에 입학하여 김인식선생으로부터 바이올린 및 악전대요등을 배웠다.
그 해 12월 23일 세브란스의학 전문대학교 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축하무대에서 독주를 3.1운동이 일어나자 난파는 "음악은 반드시 아름다운 것만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닌 민족혼이 깃들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휴학하고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애지중지하던 바이올린을 팔아 독립운동에 바쳤으며 이듬해 다시 일본으로 가서 복교를 하려 했으나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학교측으로부터 거절당하자 다시 귀국하여 창작 단편집 "처녀혼"을 출간한다.
이 단편집 서두에 애수라는 곡명으로 멜로디를 기재하였는데 이를 본 김형준 이 가사를 붙인 것이 바로 유명한 가곡의 효시인 "봉선화" 이다.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겨레의 설움과 한을 애절하게 표현한 곡으로 겨레의 소생을 간절히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었기에 빠른 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자 일제는 "봉선화"를 금지곡으로 정하고 부르는 사람은 불온죄로 투옥하는 탄압을 가했다.
1922년 난파는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를 창설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25년 국내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를 창간했으며, 그해 우리나라 사람으로 제일 처음 바이올린 독주회를 기연주자로 입단하여 교향악 연구도 하며 학업을 마쳤으며, 1929년 창작동요(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간행하여 동요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1931년 미국 시카고 셔우드 음악학교에서 음악공부를 한 후 1933년 귀국후 이화여자 전문학교 강사로 후진교육에 힘쓰게 된다. 1936년 경성 중앙방송국 양약부 책임자가 되자 곧 바로 경성학교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우리나라 사람으론 제일 처음으로 지휘자로 활약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성서 크리오 3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운동에 기여한다.
한편 신문과 잡지에 음악에 대한 교양면보급에 힘을 기울였으며 제일 처음 음악평론도로서 후학도들에게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던 중 난파는 흥사단 단가를 작곡하였다는 이유로 1936년 도산 안창호와 함께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이때 받은 고문으로 머리를 다친 것이 원인이 죄어 결성 요양원(현 위생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해방의 서광을 보지 못한채 1941년 8월 30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